한두 가지 첨삭을 직업으로 하지만,
이글에는 더 보탤 말이 없다


북한 여행

지난해 여름 후배의 호의로 팔자에 없는 금강산 관광을 갔었다. 이래저래 감회가 많았지만 두 청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나에게 북한을 우리가 물든 서구식 합리주의(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부적절한 일인지 새삼 되새기게 했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과는, 혹은 북한 바깥의 사회들과는 다른 가치관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도.

1. 북한 입국심사대에서 내 앞에서 선 부부의 서류를 살펴보던 젊은 군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부가 왜 따로 삽니까?” “예?” “여기, 주소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게.. 집이 두 챈데 세금문제 때문에..” 그 남편은 순진스럽게도 최악의 답변을 했다. 군인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여권을 툭 집어던졌다. “돈이 많구만! 집이 두 개나 있고.”
불과 5분 전 집이 두 채인 게 자랑인 사회에서 살던 그 부부는 이젠 그게 부끄러움이 되는 사회로 들어선 것이다.

2. 전날 구룡연을 오르느라 힘들었던지 다들 해금강으로 갔고 나만 만물상을 선택했다. 거의 뛰다시피 만물상을 오른 건 혼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어느 바위 위에 앉았을 때 파라솔을 펼치고 앉아있던 환경감시원이 말을 걸어왔다. 광대뼈가 나오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 북방형 얼굴을 한 그는 예의바르고 순수해보였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파주에서 왔습니다. 여기 사십니까?” “저희들은 다 이 지역에 삽니다.” “안내원들은 평양에서 온 사람들이 많던데.”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실례지만 무슨 일 하십니까?” “예, 글도 쓰고 책도 만들고 합니다.” “아, 작가 선생님이십니까? 시도 쓰십니까?” “시나 소설은 아니고 산문을 조금씩 씁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유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북한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인민들이 먹을 식량이 모자라니까 군인들이 앞장해서 먹을 것을 줄이느라 가장 고생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 청년이 제 나라의 일에 대해 자기 일처럼 말한다는 것이었다. 교육받은 선전원도 간부도 아닌, 산 아래 동네에서 차출되어 화장실이 아닌 곳에 오줌이나 똥을 누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시골 청년은 금세 눈물이 쏟아질 듯한 얼굴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다들 얼마나 돕고 고생했는지를 들려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내가 말했다. “남한 사람들도 그렇고 북한 인민들이 굶고 있다는 걸 많이 말들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현실은 미국이라는 배경을 빼고 말해선 안 되다고 봅니다. 모르긴 해도 남한이 그렇게 오랫동안 미국에 당했다면 굶는 인민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겁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남한 사람들이 훨씬 적거든요.”
“김선생님, 저는 사람의 생명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생명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잊으면 짐승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입니다.”
시간이 흘러 맨 꽁무니를 따르던 노인 관광객들까지 모두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나도 일어서야 했다. “다음에 꼭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도 금세 그랬다.

출처 : http://gyuhang.net/archives/2006/11/#000986

Posted by just2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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